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비극의 그림자 아래 선 인간의 흔적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산업화의 이면에 감춰진 폭력성과 인간 소외를 날카롭게 그려낸 사회비판적 단편소설이다. 도시 개발이라는 거대한 담론 뒤에 가려진 철거민들의 절박한 현실과 한 개인의 비극적 최후를 통해,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흔적을 생생히 조명한다. 현실에 기반한 사실주의 기법과 상징적 서사 구조를 통해 독자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하는 작품이다.
🖋 작가 소개: 윤흥길, 현실을 응시하는 이야기꾼
윤흥길(1942~ )은 전라북도 정읍 출신의 소설가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소설의 중요한 흐름을 이끈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이를 소설적 서사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한국 산업화와 그에 따른 인간 소외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어왔다.
대표작으로는 「장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완장」, 「빙판」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언제나 ‘개인의 삶’과 ‘시대의 그림자’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문학평론가들은 그를 ‘현실을 응시하는 작가’라 평하며, 시대의 상처를 증언하는 작가로 평가한다. 정교한 문체와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소설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의미하게 읽힌다.
📚 줄거리 요약
이 작품은 도시개발이 한창이던 시기, 서울 변두리 철거촌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나'라는 1인칭 관찰자로서, 자신이 근무하는 구청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회상한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철거민인 ‘정씨’가 있다.
정씨는 구청 철거 반장들과의 마찰 끝에 자신의 집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무참히 짓밟힌 인물이다. 그의 집은 불법건축물로 분류되어 강제 철거 대상이었고, 정씨는 끝까지 이를 막기 위해 저항하지만 결국 물리력에 의해 진압된다. 사건 이후 정씨는 자취를 감춘다.
며칠 뒤, 구청의 한 공무원이었던 ‘나’는 정씨가 구청 마당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옆에는 아홉 켤레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는 정씨가 남긴 유일한 유산이자, 죽음의 메시지로 해석된다. 이 장면은 작품의 가장 강렬한 클라이맥스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작품은 정씨의 죽음을 단순한 개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보지 않고, 구조적인 폭력 속에서 짓눌린 한 인간의 최후로 그려낸다. 나아가 ‘개발’이라는 이름의 문명화 과정이 어떻게 인간성을 훼손할 수 있는지를 조명한다.
🔍 문학적 평가 및 주제 의식
1. 현실참여적 사실주의
윤흥길의 이 작품은 1970~80년대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대표적인 현실참여 소설이다. 그는 인물의 개인적 불행을 사회 구조의 폭력과 긴밀하게 연결시켜, 현실 속 억압받는 계층의 고통을 생생히 드러낸다.
2. 상징성 – 아홉 켤레의 구두
작품 제목이자 결말부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아홉 켤레의 구두’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상징 그 자체다. 구두는 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얼마나 고된 노동을 했는지를 상징하고, 동시에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의 신세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3. 1인칭 화자의 역할
화자는 사건의 주변인이자 관찰자로서,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구조 속에서 침묵하거나 무기력하게 반응한다. 이는 독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동시에,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서의 개인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4. 문명 비판과 인간 소외
도시 개발이라는 이름의 문명화가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이 소설은 냉철하게 보여준다. ‘구두’는 문명의 산물이자 동시에 노동자의 고통이 응축된 결과물이며, 정씨의 죽음은 인간 중심이 아닌 개발 중심의 사회 시스템이 낳은 필연적 비극이다.
5.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
정씨의 죽음과 구두의 이미지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그 자체로 강한 서사적 충격을 준다. 이는 독자에게 단순한 연민을 넘어, 사회 구조의 불합리를 돌아보게 만들며, 개인과 국가, 발전과 인간성 사이의 균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 결론: 인간의 자리를 묻는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단순한 소설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이며, 인간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문학이다. 정씨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들은 개발의 이름 아래 사라졌고, 사회는 이를 외면했다.
윤흥길은 이러한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철거와 개발, 그리고 그 속의 인권 침해를 바라볼 때, 이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며 절실하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그 나침반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작품이다.